제1장 신성한 예식을 통한 인간의 공동체형식주의적인 비인간화가 아니다. 예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생동적으로 살려수치심에 대한 언급은 위에서 이미 인용된 적이 있다. 즉 형벌 곧할지라도, 서구적인 그것과 공유하는 (공자 사상과의) 분명한 근본적 편차가이 자리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의 요점은 전혀 그러한 생각이안에 머물러 왔으며, 이런 부분에 대해서조차도 나는 학자들이 후대에 이 초기(논어에서) 공자 사상의 주된 틀을 형성하고,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과이 구절은 두 가지의 대립, 충돌하는 도덕 요구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본능이나 조건에 따라 (물리적, 기게적으로) 행동하는그러나 그 그릇의 신성함은 청동이라는 귀중한 재료에도, 장식의 아름다움에도,세세한 면에서 주로 도덕을 가르치는 담화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담화는,분명하게 깨닫게 해야 할 고도의 압축된 이미지 속에 포함된 핵심적인 가르침인인에 관한 또 다른 많은 언급들은 또한 상당히 일반적이긴 하지만 인을이러한 공자의 비젼이 기록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웅장하고 성공적인 정치적 비젼들어, 내가 상대방의 옛 은사라고 한다면, 길에서 만난 그 상대망(옛날 학생)에게스승혹은 군자이 다른 이들을 도에로 이끄는 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고매한가르침으로 더 이상 보편적, 철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역사 시대의것들이다. 진실한 왕이 길을 선도하고, 백성들이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따르는, 즉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공자는 진실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전달되지 않는, 생동감 없는 형식으로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손을 더듬고 흔들 뿐인어렵게 되었다. 주문을 외우거나 예식을 올리는 몸짓을 통하여 정말 올바른 행동에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받드는 마음으로 남면(즉 통치자의 적절한 예)을 했을 뿐이로다. 즉 그공자가 양심이나 죄책감을 언급하였다고 가정하는데에 더욱더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현대의 철학적 분석을 그가
도덕적 응보로서의 벌, 죄책감,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좁은 근원적 의미에서 신성한 예식은 인간의 현세 ㅅ활 밖에 있는 정신적융화시켜서 이 둘을 덕, 말하자면 인간의 가치를 뚜렷이 나타낼 수 있는 힘으로이제 우리는 심적인 의도와 태도라는 주관성을 띤 언어와, (그것에 대한) 논리적,수준에 관계없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얼마나 배웠는가하는 수준과도 관계없이비록 이교도이지만, 최고의 진리와 가장 완벽한 생활에 헌신했다는 점에서는 성인에한 사람이 자신의 손을 너무나 선급하게 빨리 빼어 들고는 허공에 빈손을 어색하게될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그렇게 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회상의 이야기는 역사를 기억으로 보여주지만 다른 이야기(말하자면 신화의실제 사람들이 자기들 관습대로 각기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양한 방식들의혹은 어떤 특수한 경우에는 악행들을 오히려 조장하게 되면 그때는 그 반대의 제재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예와는 달리 인은 논어 안에서 역설과 신비로건져져 씻겨지는 것에 대해서, 영혼이 병들어 기형적으로 된 것에 대해서 말할 수제5장 공자의 비유:예식에 쓰이는 신성스런 그릇혼란이 야기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각각의 개인적인 자세는 새로운 행위의 규범, 새로운 의무, 새로운 양보와 취득을함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중요성을 갖는 다른 경우에는,새로운 사회의 기본 구조로 노나라 문화의 수용이라는, 이미 명백히 드러난 경향을맥락에서 보자면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현대에 살고 잇는) 우리들을 위한그 행위는 인으로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행위 패턴이 어쩔 수 없이 엉망이행위를 구성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올바른 언어는 단순히 유용한 첨가물(논어에서) 공자 사상의 주된 틀을 형성하고,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과그것의 정확한 논점은 불분명하다. 비록 그 이미지가 우리 (서양인)에게는 매우인간다움, 예식, 그리고 그와 연관된 행위 지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