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에 마음을 쓰게 되니 문득 상대편이적으로 느껴지외다. 알지 못하겠구려, 내가 나의두다가 흉악한 무리들에게 핍박을 받아 청교역에서 돌아가셨다. 고향으로 운구하지 못하고 그처자는 고단한 행색 부끄러워하나법령과 제도란 처음 만들어지기는 나라를 창건한 임금에 의해서지만, 수정되고 보완되는 건았다. 당시 땅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으므로 눈을 끌어모아 봉분을 만들고 그 위를 거적으로다. 아버지는 한번 이렇게 물어보셨다.512다. 금석공이 이를 받고 몹시 기뻐하며다음과 같은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우리형님께서익을 다투는 곳에서 마음을어지럽히려 하지 않았는데, 교외의강가에서 한적하게 독서와방도를 마련해 보겠다. 그렇지 않고 적발당해 그 죄상이 드러나게될 경우 난들 어찌할 수닫게 되었소이다. 이 어른의 글은 책을 펼치자마자 1만길이나 되는 빛이 뻗쳐나와 사람의으며 대구통판, 사복시정, 충주목사,수원판관, 공조참의 등을지냈다. 문집으로 태호집이정리곡을 잘 보관하고 있는지 조사하라는 어명이오!74제1부 꿈에 붓을 얻다양은 신명이 되고, 음은 귀신이 된다. 귀신이란 딴데 있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 얻게 되었다. 무릇 공인이나 장인 가운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곧 그 솜씨가 배렸는데, 곧 뜰에 투서한 자였다. 아전들이 깜짝 놀라귀신 같다고 여겼다. 그 후 아전들의인물이다. 조광조 등과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다가훈구파의 탄핵을 받고 외(정조의 세자였던 문효의 묘)로 향하게되었다. 아버지는 고훤랑(임금의 거동 때에어로의모인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웃었다. 아버지는 당시감사가 의견을 물었으므로 아무렇게나아버지는 소를 타고 미호 김공(김원행)을 찾아뵌 적이 있다. 공은 아버지의 태도와 말씨를나를 위해 비평을 좀 해주게!라고 하셨다.재한 한시 형식, 근체시에 비해 형식이 자유롭다.)와 근체시를 다 합해도 50수 밖에 되지 않답안지를 바칠 때 이름을 적은 명부도 함께 바치도록 분부하셨다.때마다 문세가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이 구절과 저 구절을 조응시키며 말을 여닫거나 마
51이처럼 식견 높고 이치가 정밀하니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백성들을 안정시키고박제상(17701842). 자는 노옥. 본관은 반남. 사익의현손, 대원의 증손, 해수의 아들인데입에는 반함을 아니했으니,그만 하룻밤의 기쁨을 잃어버렸구려. 라고 하셨다.그리고는 바로 술을 청해 그들과함께그리하여 널빤지를 깔아 다리를 설치하였다.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아버지는 또 조정에서 청나라의 동전을 사와 국내에 유통시키자는 논의가 전개되고있다주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헌공(홍대용)이 돌아가시자 지기를 잃은 슬픔 때문(원문은 취수기, 용골차를 가리킨다.) 따위를 능히 마음속으로 궁구하여 손수 제작해냈다. 모운을 핑계삼아 관아로 되돌아오시며 말씀하시기를, 멀리 있는창고는 천천히 조사하자.라박종악(17351795). 자는 여오, 호는 창암.본관은 반남. 문과에 급제하여우의정을 지냈자기 마음대로 관아에 출입하며 의술을담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족처럼 친해졌다.그평측을 따져야 하니 시 짓는 일 어렵고는 웃으며, 얼른 각수장이(나무나 돌 따위에 글이나 문양을 새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살를 실행하고 확대했을 따름이다. 법을 활용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법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보여준다고들 했다.집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당시 정승이 된 지 이미 오래였건만 방 안에는 바람을 막는 병풍너희들이 걸핏하면 도망가버리겠다고 하는데 그 실정이 참으로딱하다. 그러나 고을 원들이 물러나와 그 통인에게 케물으니, 그는 곧 접때 익명으로 투서한 자였다. 그 후 또 어떤르다고하여 모두 병을 핑계되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다. 그래서 지금껏 아버지 문집에 수록하지 못하였다. 그 글을 보신 분들은 꼭 좀 찾아서 보다.하였다.1백 권 홍재신서7게 하자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천주교 관련책자나 예수의 초상을 스스로 갖고 와서 바친분들은 이전에 자기가 다스리던 고을 봉록의 많고 적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다가 아버지더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다